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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숭배, 추석이 돌아오면 벌초를 하러 고향으로 간다. 1년에 한 번은 산소에 있는 무덤의 잡초를 제거해 주어야 한다. 올해에도 벌초를 하러 갔다.



올해에도 변함없이 추석이 돌아오고 있다. 추석을 맞이하는 준비는 벌초로부터 시작이 된다. 추석이 돌아오기 전 한 달 전에서 1주일 전까지이다. 가장 교통량이 급증하는 것은 2주전부터 1주전이 가장 혼잡하다. 물론 불가피한 경우는 추석 당일에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날은 피하는 것이 좋다.

9월 13일이 추석이고, 앞뒤로 연휴이다. 추석이전에 벌초를 하는 것이 상례이다. 시간이 바쁘지만 시간을 내어야 한다. 그래서 9월 2일에 벌초를 하기로 시간을 정하였다. 나는 일요일 밤에 내려가기로 하고 아들도 일요일 밤에 내려가기로 하였다. 서로 다른 지역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함께 한 차로 가면 좋겠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그렇게 되지 않았다. 아들은 회사에서 월차를 내서 일요일 밤에 회사가 있는 곳에서 출발하였다. 내가 먼저 출발을 하여 도착하니 밤 12시가 되었고, 아들은 자정을 넘어 20분쯤에 조금 늦게 도착하였다.

몸이 불편한 부모님이라 기다리지 말라고 하였다. 열쇠는 아는 곳에 넣어 두라고하였다. 도착하여 열쇠를 찾아서 문을 열고 들어갔고, 주무시다가 도착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고 깨어 일어나셨다.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아들도 도착하여서 한참이야기를 나누고 새벽 2시가 되어서 잠들었다. 시골은 아침이 이르다. 저녁도 빨리 돌아온다. 그렇기 때문에 벌초하러 올라가는 것도 일찍 가기로 하였다. 월요일 아침 7시에 출발하여 집에서 한 300 미터 거리에 있는 군부대 앞에 차를 세워놓고 군부대 담장을 끼고 난 길을 따라 산으로 올라갔다.




[벌초하기 전의 산소 무덤의 상태]








[벌초하기 전의 모습]



준비물은 휘발유를 사용하는 예초기, 장화, 보충할 휘발유통, 장화, 목장갑, 보호모자, 긴팔 옷, 낫, 갈퀴를 가지고 갔다(빠진 것은 벌레방지 스프레이, 삽, 땀 닥을 수건과 간식). 예초기는 요즘에는 배터리를 사용한다고 하는 편리함이 있지만 사용시간이 좀 걸릴 경우는 휘발유 예초기가 좋다. 산에서 예초기를 사용하다 보면 의외로 다른 것을 또 벌초를 해야 할 때가 있어서 시간이 더 걸 수 있기에 배터리는 여유분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되지만 휘발유는 통 하나를 가지고 가서 보충하면 끝이다. 휘발유를 사용하는 것이든 배터리를 사용하는 것이든 용도에 맞게 사용하면 좋을 것이다.



[벌초하는 모습]




그런데 깜박한 것은 간식이다. 미리 챙겨놓고 이것저것 챙기느라고 간식으로 물과 먹을 것을 준비해 놓았는데 잊어버리고 올라갔다. 벌초하는 시간은 1시 30분 정도 걸린다. 벌초를 하는 동안에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모기와 벌레들이 달려든다. 산소만 풀을 베는 것이 아니라 산소 주변에 있는 우거진 풀들을 잘 정리해야 한다. 이른 아침이라 이슬과 물기가 배어 있어서 축축하다. 예초기도 풀들이 젖어 있으면 조심해야 한다. 때로는 작은 돌들이 이리저리 튀기에 벌초하는 뒤에 있어야 한다.


   [벌초한 모습1]


   [벌초한 모습2]



벌초하기 전의 모습과 벌초한 후의 모습을 찍어 놓았다. 산이라 잔디를 심어놓아도 잔디가 잘 이식이 되어 자라기가 쉽지 않아 연구 중이다. 뗏장을 입혀놓아도 잘 붙지를 않고 하여, 그냥 잔디 씨를 뿌릴까도 생각 중이다. 산에 한 번 올라오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산에 올라올 엄두를 못내는 가파른 산꼭대기이다. 남자라도 건강하지 않으면 집에서 그냥 있으라고 해야 하는 곳이다.

아들이 묻는다. 할아버지 할머니 돌아가시면 이곳에 올 거냐고. 아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저쪽 군청에서 운영하는 공원묘원이 있다. 그곳은 차가 다 올라갈 수 있어서 그곳으로 모실 것이라고 했다. 이곳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할 수 있으면 산소는 가족 친지들이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썼으면 한다. 화장을 하든, 매장을 하던 그것은 가족들이 상의해서 하면 되는 것이다.


벌초가 끝나고 내려오니 오전 9시가 되었다. 아침을 먹고, 샤워를 하고, 아들은 먼저 집으로 보내고 나는 남아서 뒷정리를 하였다. 예초기도 분해를 해서 WD로 기름칠을 잘 해놓아야 내년에도 사용할 수 있다. 그냥 두면 녹슬어서 망가진다. 불편한 부모님이라 목욕을 혼자 할 수 없기에 목욕탕을 가기로 했다. 전화를 해도 받질 않아서 일단 가보자고 했다. 가보니 대화웰빙사우나도 휴장이고, 평창목욕탕도 휴장이었다. 드라이브만 잘하고 돌아왔다, 집에서 하려고 하니 괜찮다고 하였다. 추석 때 가면 조금 먼 곳이지만 상시로 휴일 없이 운영하는 곳으로 가야겠다고 생각을 하였다.

고향에서 2시에 출발하여 서울로 진입하자 고속도로보다 시내 상황이 더 막히기만 했다. 앞차의 운전자가 피곤해 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앞 차 운전자의 졸리운 모습. 하품이 그 증거다.]


교통 체증이 되자 피곤이 몰려오고 하품이 발생을 한다. 피곤은 운전의 금물이다. 졸립고 하품이 나면 얼른 가까운 곳에 차를 대고 휴식을 취하고 가야 한다. 내 앞차의 운전자가 몸시도 피곤하고 졸리운 모습이다. 안전하게 운전을 하여야 할 터인데 걱정스럽지만 안전하기를 바랄 뿐이다. 서울 시내에서 지체가 되는 것이 있었지만 6시 경에 오늘도 무사히 안전하게 집에 도착하였다. 아들이 먼저 출발하였고, 무사히 도착하였다고 카톡으로 보내왔다. 나도 도착했다고 카톡을 날렸다. 수고했다. 나도 수고했고. 이렇게 하루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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